학기 첫 주에 학생들이 포스트잇에 바라는 교실의 모습을 적고, 비슷한 의견끼리 묶어 학급 규칙을 만드는 장면은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완성된 규칙이 벽에 붙은 채 생활과 분리되거나, 실제 갈등이 생겼을 때 교사가 원래의 규칙으로 돌아간다면 학생의 참여는 한 번의 의견 수렴으로 끝납니다.
공동 주도성은 모두가 한 번씩 말했는가보다 서로의 판단이 실제 결정을 바꾸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학생의 제안이 규칙의 문장을 바꾸고, 교사의 설명이 학생의 판단 근거를 넓히며, 시행 결과가 다시 모두의 선택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학급 규칙은 이 순환을 작게 연습할 수 있는 교실의 공동 설계입니다.

함께 정했다는 말보다 결정의 경로를 봅니다
학생이 규칙을 제안했더라도 최종 문장을 교사가 모두 고쳤다면 참여의 범위는 제안에 머뭅니다. 다수결로 정했더라도 소수의 학생이 겪을 불편과 안전 문제가 검토되지 않았다면 공동의 판단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교사가 먼저 제한을 제시했더라도 그 이유를 공개하고 학생이 방법을 바꾸거나 시행 뒤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면 공동 주도성이 작동할 여지가 있습니다.
OECD Learning Compass 2030은 공동 주도성을 학생,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가 공동의 목표를 향해 서로 돕고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학생이 모든 결정을 가져가는 상태도 아니고, 성인이 마련한 선택지에서 학생이 하나를 고르는 상태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서로 다른 책임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가르침과 배움을 공동으로 구성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학급 규칙을 평가할 때는 결과 목록보다 결정의 경로를 남겨야 합니다.
- 처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 제안의 이유를 설명하고 질문할 기회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 의견이 다를 때 어떤 기준으로 비교했습니까.
- 학생의 말로 실제로 달라진 문장이나 실행 방법은 무엇입니까.
- 시행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제안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목소리만으로는 참여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Laura Lundy는 아동의 참여를 목소리 하나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며 공간, 목소리, 청중, 영향이라는 네 요소를 제시합니다. 안전하게 의견을 만들고 표현할 공간이 있어야 하며,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와 지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의견을 책임 있게 들을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의견이 결정에 적절한 무게로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틀로 학급 회의를 보면 손을 들어 발언하는 장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전에 생각을 적을 시간은 있었는지, 공개 발언이 어려운 학생이 다른 방식으로 의견을 낼 수 있었는지, 교사가 답하기 곤란한 제안도 기록했는지, 반영하지 못한 의견에는 이유를 설명했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교사가 모든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향은 학생이 말한 대로 결정된다는 의미보다 그 의견이 의사결정 과정에서 진지하게 검토되고, 반영 여부와 이유가 다시 학생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의견을 받았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는 구조에서는 학생이 다음 제안을 이어갈 근거를 얻기 어렵습니다.
교사의 경계는 공동 주도성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학급의 모든 규칙을 협상할 수는 없습니다. 안전, 타인의 권리, 법과 학교 규정처럼 교사가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경계가 있습니다. 이 경계를 숨긴 채 자유롭게 제안하라고 하면 학생은 바꿀 수 없는 것을 제안한 뒤 거절당하는 경험을 반복합니다. 처음부터 교사가 정할 것과 함께 정할 것, 학생이 정할 것을 구분하는 편이 더 정직합니다.
교사의 경계가 곧 통제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Koestner, Ryan, Bernieri와 Holt는 초등 저학년 아동의 미술 활동에서 제한을 통제적인 방식으로 전달한 조건과 정보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달한 조건을 비교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제한의 존재보다 제한을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며, 이유와 선택의 여지를 담은 정보적 제한은 내적 동기를 훼손하지 않고도 경계를 세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학급 규칙에서도 같은 차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떠들면 안 됩니다”라는 문장은 교사가 원하는 행동만 알립니다. 반면 “설명을 듣는 사람과 집중해서 작업하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활동마다 필요한 소리의 수준을 정합니다”라는 문장은 경계의 이유를 밝히고 구체적인 방법을 함께 판단할 여지를 남깁니다.
교사는 협상할 수 없는 경계를 다음과 같이 다룰 수 있습니다.
- 어떤 내용이 협상되지 않는지 처음부터 분명히 밝힙니다.
- 경계가 보호하려는 사람과 권리를 설명합니다.
- 경계를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은 여러 안으로 제안할 수 있게 합니다.
- 적용 결과가 특정 학생에게 불리하지 않았는지 다시 검토합니다.
규칙은 명사보다 장면으로 씁니다
존중, 배려, 책임 같은 단어는 중요하지만 사람마다 떠올리는 행동이 다릅니다. “서로 존중합니다”라고 적으면 모두 동의하기 쉽지만, 모둠에서 한 사람이 오래 말할 때 어떻게 할지, 친구의 결과물에 반대 의견을 어떻게 전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언제 말을 꺼낼 수 있을지는 정해지지 않습니다.
규칙을 실제 장면으로 바꾸면 논의할 수 있는 지점이 생깁니다. “존중합니다”를 “의견을 반박할 때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근거를 묻습니다”로, “책임감을 가집니다”를 “맡은 일을 마치기 어렵다면 마감 전에 모둠에 알리고 역할을 다시 나눕니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문장이 구체적일수록 실행 뒤 무엇을 다시 볼지도 분명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규칙의 수를 늘리는 것보다 자주 반복되는 몇 장면을 고르는 편이 낫습니다. 최근 학급에서 불편했던 순간을 익명으로 모으고, 그때 누구의 어떤 권리가 충돌했는지 살핀 뒤, 다음에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사용할 행동을 규칙으로 씁니다.
제안에서 재협상까지 다섯 단계로 이어갑니다
공동으로 만든 규칙이 생활 속에서 작동하려면 한 차시의 회의를 넘어서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연구소는 학급 규칙의 공동 설계를 제안, 검토, 결정, 시험, 재협상의 다섯 단계로 정리합니다.
- 제안 단계에서는 최근의 구체적인 장면을 모읍니다. 사람의 이름이나 성격을 평가하지 않고 언제, 어떤 행동 때문에, 누구에게 어려움이 생겼는지 적습니다.
- 검토 단계에서는 제안이 보호하려는 권리와 예상되는 영향을 살핍니다. 말하기 쉬운 학생뿐 아니라 그 규칙의 영향을 크게 받을 학생의 관점을 먼저 확인합니다.
- 결정 단계에서는 다수결에 들어가기 전에 안전, 공정성, 실행 가능성과 같은 판단 기준을 합의합니다. 반영하지 않은 제안도 이유와 함께 기록합니다.
- 시험 단계에서는 규칙을 완성본으로 선언하지 않고 정한 기간 동안 사용합니다. 잘 지켰는지만 확인하지 않고 도움이 된 장면과 예상하지 못한 불편을 함께 기록합니다.
- 재협상 단계에서는 기록을 근거로 문장, 적용 범위, 도움의 방법을 고칩니다. 수정하지 않기로 했다면 그 이유도 남깁니다.
이 다섯 단계에서 가장 자주 빠지는 것은 시험과 재협상입니다. 첫 회의에 많은 시간을 썼더라도 고칠 날짜가 없다면 규칙은 곧 교사가 집행하는 고정된 기준이 됩니다. 반대로 짧게 만든 규칙이라도 다시 볼 날짜가 정해져 있으면 학생은 생활의 결과를 근거로 다음 판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의견 차이가 드러나야 공동의 판단이 시작됩니다
학급 회의가 조용하고 빠르게 끝나는 것이 언제나 좋은 신호는 아닙니다. 이미 말이 빠른 학생의 제안에 다른 학생이 따라갔거나, 교사가 선호하는 답을 학생들이 눈치챘을 수도 있습니다. 공동 주도성은 갈등이 없는 상태보다 의견 차이를 안전하게 다룰 수 있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모둠 활동 중 음악을 허용하자는 제안에는 집중이 잘된다는 경험과 대화가 끊긴다는 경험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찬성과 반대로 바로 나누는 대신 어떤 활동에서, 누구에게, 어떤 조건일 때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규칙은 허용 또는 금지의 한 문장에서 개인 작업 시간에는 이어폰을 선택할 수 있고 협의 시간에는 모두가 대화를 들을 수 있게 한다는 식의 조건부 설계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 예시는 특정한 정답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경험을 지우지 않고 공통의 목적과 적용 조건을 찾는 사고 과정을 보여줍니다. 좋은 합의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갖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이 어떤 근거로 하나의 실행안에 연결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참여 방식도 함께 설계합니다
공개 발언만 사용하면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학생, 다수 의견에 반대하기 어려운 학생, 말보다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기 편한 학생의 관점이 빠질 수 있습니다. 참여 기회가 동일해 보여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는 다릅니다.
학급 규칙을 만들 때는 의견을 내는 통로를 여러 개 둡니다. 개인 기록 뒤 짝과 이야기하고 전체 회의로 이어가거나, 익명 제안함과 공개 제안을 함께 사용하거나, 말로 나온 내용을 교사가 문장으로 확인해 다시 보여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식의 수가 아니라 각 방식으로 들어온 의견이 같은 검토 절차를 거치는가입니다.
또한 규칙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학생에게 먼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모둠 자리 배치 규칙이라면 이동이나 감각 환경에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의 경험이 중요하고, 발표 규칙이라면 공개 발언에 부담을 느끼는 학생이 사용할 대안이 함께 논의되어야 합니다. 평균적인 학생을 상정한 합의는 참여하지 못한 학생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규칙 위반보다 규칙의 작동을 기록합니다
공동으로 만든 규칙을 평가할 때 위반 횟수만 세면 규칙을 지키지 않은 학생에게 시선이 모입니다. 연구소는 규칙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었는지, 누구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누구에게는 새로운 어려움을 만들지 않았는지를 기록합니다.
- 규칙을 사용해 학생끼리 문제를 조정한 장면이 있었습니까.
- 교사의 지시 없이도 규칙의 이유를 서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까.
- 같은 규칙이 학생과 교사에게 일관되게 적용되었습니까.
- 규칙 때문에 참여하기 어려워진 학생은 없었습니까.
-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규칙을 해석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었습니까.
- 학생의 제안으로 실제 문장이나 실행 방법이 바뀌었습니까.
- 수정한 이유와 결과가 다음 학급 회의에 남았습니까.
이 기록은 학생을 통제할 더 정교한 규칙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구성원이 공동의 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경험과, 그 영향에 함께 책임지는 경험이 연결되었는지 보기 위한 것입니다.
공동 주도성은 고칠 수 있는 규칙에서 자랍니다
학급 규칙을 함께 만든다는 것은 결정권을 한 번 나누는 행사가 아닙니다. 의견을 만들 공간, 표현을 돕는 지원, 책임 있게 듣는 사람, 결정에 미치는 영향, 실행 결과를 보고 다시 고칠 기회가 연결되는 과정입니다.
교사는 이 과정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안전과 권리의 경계를 책임지고, 말하기 어려운 학생의 참여 통로를 만들고, 서로 다른 의견을 비교할 기준을 제시하며, 결정과 수정의 기록을 남깁니다. 학생은 정해진 규칙의 수용자가 아니라 자신의 제안이 공동의 생활에 미친 영향을 보고 다음 판단을 하는 사람으로 참여합니다.
그래서 공동 주도성은 완벽한 규칙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처음의 판단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함께 사용한 결과를 근거로 다시 고칠 수 있는 규칙에서 자랍니다.
참고 문헌
- OECD (2019), Student Agency for 2030, 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 Concept Note.
- Lundy, L. (2007), Voice is not enough: Conceptualising Article 12 of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British Educational Research Journal, 33(6), 927–942.
- Koestner, R., Ryan, R. M., Bernieri, F., & Holt, K. (1984), Setting limits on children’s behavior: The differential effects of controlling versus informational styles on intrinsic motivation and creativity, Journal of Personality, 52(3), 233–248.